7월 말, Legora의 서울 사무소 오픈 소식. 시드니, 싱가포르, 도쿄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네 번째라고 한다. 보도자료 보면 시장 규모나 제품 자랑보다 아래 문장에 눈이 간다.
“the hardest part of AI in legal isn’t the technology alone but adoption” (아시아-태평양과 일본 비즈니스를 맡은 Legora VP Heather Paterson의 말)
법률 AI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쓰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첫날부터 현지에 팀을 셋팅하겠다고.
제품을 파는 회사가 정작 어려운 건 제품이 아니라고 말한 셈이다.
한국에서 맞붙는 Harvey와 Legora
7월 1일, 법무법인 태평양이 Harvey를 도입해 전체 구성원이 쓸 수 있게 한다고 밝혔다. 변호사와 전문위원과 고문까지 900명 규모이고, 국내 로펌으로는 처음이다.
왜 전사(firm-wide) 도입을 하느냐는 질문에 태평양은 이렇게 답했다. 소송이나 M&A를 하면 수만 장에서 수십만 장짜리 자료를 한꺼번에 올려놓고 여러 변호사가 나눠 본다. 그러니 일부에게만 계정을 주면 애초에 소용이 없다.
태평양은 Harvey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도구를 스택처럼 쌓았다.
국제 계약을 검토하거나 외국 법령을 볼 때는 Harvey, 국내 판례와 법령은 엘박스와 슈퍼로이어, 문서 작성이나 번역 같은 일반 업무는 8월 5일에 도입한 ChatGPT Enterprise. 여기에 리걸테크 회사 멘타트와 함께 자기 데이터로 돌리는 시스템을 따로 구축하고 있다. 태평양의 이준기 대표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AI를 단순히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 AI를 전제로 업무 프로세스 전체를 재설계해야 할 때”
4천만 달러까지 내려온 자체 모델 구축 비용
2월 초에 Anthropic이 Claude Cowork에 법률 플러그인을 붙였다. 계약 검토, NDA 선별(triage), 컴플라이언스 점검. 사내 법무팀 업무를 겨냥했고 회사마다 자기 기준과 리스크 감각에 맞춰 고쳐 쓸 수 있게 했다. 모델 만드는 회사가 법률 제품을 자기 플랫폼에 직접 담은 첫 사례이다.
주식 시장이 바로 반응했다.
2월 3일 하루에 Thomson Reuters(Westlaw)가 16%, RELX(LexisNexis의 모회사)가 14%, Wolters Kluwer가 13% 빠졌다. 변호사에게 법률 정보를 팔아 먹고사는 세 회사의 주가가 같은 날 같이 빠졌다. RELX는 1988년 이후로 하루에 이만큼 떨어진 적이 없다.
Morningstar는 실적 추정치를 바꿀 만큼의 위협은 아니라고 봤다. Thomson Reuters야 영업이익의 45%를 법률에서 벌지만 RELX와 Wolters Kluwer는 10에서 13%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LexisNexis는 이 흐름에 맞서지 않았다. 2월 말에 자사의 제품인 Protégé에 Claude Cowork 플러그인을 붙였다. 모회사 주가가 빠진 지 3주 만이다.
5월에 Anthropic은 이걸 분야별로 쪼개서 더 늘렸다. Claude for Legal. 계약법과 노동법과 소송으로 분야를 나눈 플러그인 12종, 에이전트 80개 남짓, MCP 커넥터 20여 개를 Apache 2.0으로 풀었다.
그리고 8월 24일, 2월에 Anthropic 때문에 주가가 깎였던 Thomson Reuters가 자체 모델을 발표했다. 모델 이름도 Thomson.
오픈소스 모델을 가져와 중간학습(mid-training)과 후속학습(post-training)을 얹었다. 학습에는 자체 보유 데이터만 썼다. 판례 데이터베이스 Westlaw, 실무 자료 Practical Law, 조세 자료 Checkpoint, 그리고 자사 통신사인 로이터의 기사다. 인건비와 컴퓨팅 모두 합쳐 4천만 달러. 가진 자료의 10%도 안 썼다고 밝혔다. 우선 자사 법률 AI인 CoCounsel Legal의 표 분석(Tabular Analysis) 기능에 넣고, 플랫폼의 나머지는 계속 여러 회사 모델을 섞어 쓴다.
Thomson Reuters 기술 총괄 Joel Hron은 이렇게 말했다:
“bigger models, more compute, more money. Thomson shows there is another path.”
더 큰 모델과 더 많은 컴퓨팅과 더 많은 돈이 답이라고들 했는데 다른 길이 있었다고.
벤더 쪽도 같았다. 8월 18일 Harvey가 Harvey II를 내면서 자체 법률 모델 Tenet을 같이 꺼냈다. 프론티어급(frontier-level) 성능을 오픈소스 수준 비용으로 낸다는 주장이다.
다만 두 회사 다 처음부터 사전학습(pre-training)을 한 게 아니라 오픈소스 위에 후속학습을 얹었고, Harvey는 어떤 모델을 기반으로 썼는지도 성능을 어떻게 재봤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법률에 특화된 모델을 직접 만드는 데 예전엔 수십억 달러가 들었다. 이제 수천만 달러면 된다. 모델을 가졌다는 말로는 더 이상 해자를 구축했노라 자랑하기 어려워졌다.
신규 투자보다 인수가 많아진 리걸테크
크런치베이스 집계로 리걸테크 스타트업 투자는 2025년 46억 달러가 최고였다. 2026년은 8월까지 22억 달러를 조금 넘겼다.
열기가 식은 건 아니다. 올해 5천만 달러 넘는 라운드가 12건인데 그중 8건이 시리즈 A와 B 스테이지. 큰돈이 이미 자리 잡은 회사가 아니라 아직 초기의 회사로 간다는 뜻이다. 승자가 정해진 판이면 돈은 후기 단계로 몰린다.
가장 선두에 있는 Harvey는 지금까지 12억 달러를 모았고, 155억 달러 밸류로 5억 달러를 더 찾는다는 보도가 있다. Legora는 6억 달러를 55억 달러 밸류에 받았다.
인수 쪽은 더 활발하다. 올해 Legora가 다섯 곳 넘게, Harvey가 세 곳 넘게 사들였고 인수 가격은 어느 쪽도 밝히지 않았다. Wolters Kluwer는 법률 비용 관리 회사 Brightflag를 5억 달러에, 변호사용 AI 업무 공간 Libra를 1억 500만 달러에 샀다.
신규 자금 유입은 주춤하고 M&A는 활발해지면 판이 정리되는 중으로 볼 수도 있다.
구글은 플랫폼, 마이크로소프트는 Word
8월 25일(바로 어제), 구글이 Gemini Enterprise for Legal을 발표했다. 별도의 법률 제품이 아니라 기존 Gemini Enterprise 안에서 Harvey와 Thomson Reuters와 LexisNexis를 플러그인으로 꽂게 하고 그 위에 에이전트를 얹은 형태이다. 어떤 모델을 쓸지도 고객이 고를 수 있게 했다. 고를 목록에 Gemini만 있는 게 아니다. 구글 클라우드는 Anthropic의 Claude도 관리형으로 함께 판다.
구글 클라우드 제품 디렉터 Amrita Mehrok은 로펌이 이 안에 들어 있는 모델 중에서 골라 쓰면 된다고 했다. 모델이 무기가 아니라는 선언에 가깝다. 개별 도구를 만드는 대신 그 도구들을 꽂아 쓰는 자리에 앉은 것이다.
파는 것은 네 가지다. 계약 검토와 인용 검증과 규제 동향 감시 같은 업무별 스킬 묶음, 문서 관리 시스템과 사건 저장소에 붙는 MCP 커넥터, 이미 쓰는 접근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는 구조, 그리고 로펌의 설정과 배포를 돕는 파트너들이다. Legora도 같은 날 파트너로 합류했다고 자기네 뉴스룸에 올렸다.
Mehrok은 그 글을 이렇게 맺었다:
“A point solution can solve a single task, but a governed, open AI platform creates the foundation for real transformation.”
포인트 솔루션은 한 가지 업무를 풀지만, 거버넌스를 갖춘 개방형 AI 플랫폼은 진짜 전환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출범 파트너는 Cleary, Freshfields, Weil 그리고 Williams & Connolly. 네 곳 다 미국과 영국의 대형 로펌이다.
구글이 이 싸움의 위쪽 레이어를 가져갔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아래쪽 레이어로 내려갔다. 변호사가 실제로 손을 대고 일을 하는 전장이다.
4월 30일, 마이크로소프트가 Word 안에 법률 에이전트를 넣었다. 레드라인(redline)을 만들고, 상대방이 고친 부분을 검토하고, 사내 플레이북에 맞춰 조항을 본다. 8월 정식 출시. 따로 설치할 것 없이 Word의 Copilot 창에서 바로 뜬다.
변호사 문서 작업의 대부분은 MS Word에서 벌어진다. 기능을 하나 더 붙인 게 아니라 일이 벌어지는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주의: 한국 송무에서는 여전히 아래아한글을 쓴다!)
두 회사가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면서 같다. 바로, ‘플레이북’이다. 구글은 그 로펌의 플레이북과 문체를 강제한다고 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사내 플레이북에 맞춰 검토한다고 했다. 둘 다 모델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앞세우지 않았다. 고객이 이미 가진 기준을 지킨다는 쪽을 팔았다.
구글이 파트너 생태계를 따로 챈 대목이 남는다. 그 파트너들이 하는 일이 로펌의 설정과 배포다. 플랫폼을 만든 쪽이 도입은 자기가 못 한다고 인정한 셈이다. Legora가 첫날부터 현지에 팀을 두겠다고 한 이유와도 같다.
Harvey와 Legora처럼 한 가지 업무를 파는 회사가 무서워해야 할 상대는 옆집 경쟁사가 아니다. 위와 아래가 열리는 일이다. 위가 열리면 팔 곳은 늘어나는 대신 값을 정하는 손이 한 칸 위로 올라간다. 아래가 열리면 일이 벌어지는 화면을 남이 차지한다.
로펌은 사기만 하던 자리에서 만드는 쪽으로 옮겨간다. Kirkland & Ellis는 자체 AI를 구축하는 데 5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로 Palantir와 사모펀드 자금 모집용 플랫폼을 만들었고, 소속 변호사 1,000명 넘게 쓴다.
Goodwin Procter는 Claude를 자사용으로 고쳐 벤처투자 계약용 도구를 만들었다. 어쏘 변호사 여섯 명이 만들었다. 연말까지 변호사 100명을 이 일에 전담으로 투입하고,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100명도 함께 붙인다고 한다. 여기에 매년 2,500만 달러를 쓴다는 계획이다.
프롬프트를 묻지 않은 Harvey의 시험
8월 17일, Harvey가 리걸 엔지니어링 인증 과정을 무료로 열었다. 두 시간이면 끝나고 Harvey 유료 유저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다. 통과하면 배지를 준다. (나도 배지를 받았다!)
법률 전문성(legal expertise), AI 다루기(AI fluency), 프로세스 설계(process design), 사용자 정착(user enablement). 목차만 보면 AI 다루기가 제일 두꺼워 보인다. 프롬프트 잘 짜는 법을 가르치는 과정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계속 돌아오는 질문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먼저 그릴 수 있느냐, 그리고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느냐였다. 도구 얘기부터 꺼내지 말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그리라고 가르친다.
리걸 엔지니어가 하는 일을 보면 변호사 수준의 법률 전문성을 가진 현장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퍼실리테이터에 가깝다. 법을 아는 사람이되 법을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일이 어디서 막히는지 보고 사람을 움직이는 자리다. 다만 도구를 직접 만져 보고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조심스럽지만, 전망 한 스푼
모델은 더 싸질 것이다. Thomson Reuters가 가진 자료의 10분의 1도 안 쓰고 4천만 달러에 만들었다. 남은 자료를 다 넣는다고 해서 수억 달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Wolters Kluwer도 LexisNexis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법률 정보를 파는 회사가 저마다 자기 모델을 들고 나오면, 모델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견적서의 한 줄이 된다.
그런데 모델이 싸지면 변호사의 하루가 달라질까. 아직 모른다. Thomson도 우선 표 분석 한 기능에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그대로 남의 모델을 쓴다.
가격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계약은 정가표가 아니라 건마다 견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구글 발표보다 벤더 쪽을 봐야 한다. Harvey나 Legora의 좌석(seat)당 가격이 내려가거나, 구글 구독에 법률 기능이 슬쩍 끼워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가격을 정하는 주도권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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