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으로 충분하다

    1/ 감정 표현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훼손,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타인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40쪽)

    2/ 내면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고통을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이때 생겨나는 불편감은 자신에 대한 건강한 문제의식의 결과이며 현실에 대한 적절한 감정이입이다. 그때의 불편함은 건강한 불편이다. 건강한 불편의 반대말은 안전한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안전한 불행이란 겉으로는 안전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론 그 사람의 현실감각을 깎아먹어서 결국엔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66쪽)

    3/ 정서적인 불편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지적으로 전환해서 생각하는 것, 불편한 느낌이나 감정이 잘 감당되지 않을 때 느낌보다 생각과 판단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이것이 ‘주지화(intellectualization)’라는 심리방어기제이다. (73쪽)

    4/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할 때 갖는 원형적인 욕구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잘 스며들고 흡수되어 충분히 공감을 받았다는 느낌 그 자체이다. 고통스러운 내 감정이 타인에게 공감을 받았다는 것은, 내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내가 그런 감정을 가져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깊은 위로와 함께 근원적인 안정감을 얻게 된다. (73쪽)

    5/ 내 말이나 행동의 이면을 자꾸 분석하고 따져봐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가로막는다. 아무리 옳고 정당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게 되는 순간, 그 진리는 사람을 속박한다.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때의 진리란 반치유적인 압박에 불과한 것이다. (86쪽)

    6/ 사람들이 자기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래 덮어두고 있는 것은 이해 못해주는 타인들의 반응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상처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등의 틀로 자신의 상처와 자기를 단정하고 있기 때문에 덮어둘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치료자가 그의 상처와 그에 대한 감정을 접하면서 ‘비난’하지 않고 그의 감정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해줄 수 있다면, 또한 그가 그런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상처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합리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다면, 그는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것이 치유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124쪽)

    7/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드러낼 수 있다면, 그러고서도 이해받고 공감받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치유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 안정감’을 느껴본 사람은 변한다. 편해지고 너그러워진다. 치유의 마지막 종착역에서 결국 얻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어려운 말로는 ‘건강한 자기애’라 한다. (125쪽)

    8/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받고 지지받으면 직접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나 충동이 오히려 줄어든다. 아무도 몰라주면 언젠가 꼭 감행할 행동도 충분한 지지와 이해를 받으면 안 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하더라도 이성을 잃지 않고 합리적으로 하게 된다. 충동적, 우발적인 행동은 오랫동안 내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등 결핍이 있을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과 지지는 충동적, 돌발적 행동을 포기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149쪽)

    9/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인정 이후에 따라오는 것은 ‘우울’이다.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면 맥이 풀리고 무력감이 들고 우울해진다. 당연하다. 이때의 우울은 치유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찰과 치유의 과정을 제대로 밟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우울하고 마음껏 무력해도 된다. 충분히 그러고 나면 간절했던 그 욕구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갖게 된다.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나면 그 욕망과 욕구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게 된다. (161쪽)

    10/ 나를 ‘사람’ 일반의 존재로 객관화해서 보는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내 상황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볼 수 있다면, 그 거리가 주는 핵심 미덕은 ‘연민’이다. 나란 존재에 대해 여유로운 거리를 확보한 채 연민할 수 있다. 연민은 자신을 따뜻하게 응시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이다. (168쪽)

    11/ 희생적인 부모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아이’만 존재하고 ‘부모 자신’의 존재성은 희미하다. 아이의 욕구, 감정, 선호는 빠르게 감지하고 인정하지만 부모 자신의 욕구나 감정 등은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관계에서 자란 아이는 ‘아이’도 ‘부모’도 인정되는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성 속에서 자란 아이와는 다르다. 사람 관계 맺기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249쪽)

    12/ 어떤 말을 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그 말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 그것은 치유 과정 속에 숨어 있는 비밀 중 하나다. (261쪽)


    ¶ 원문: 정혜신, ⟪당신으로 충분하다⟫ (구매하기)

    책: 정혜신, ⟪당신으로 충분하다⟫ (2013)
  •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

    에릭 호퍼,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005) 읽었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칭하는 표현 중 이보다 나은 것은 찾기 힘들다. 그는 거의 평생을 길 위에서 보냈다. 그가 여느 부랑자, 떠돌이 노동자와 다른 점은 틈나는 대로 글을 읽고 또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다.

    에릭 호퍼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건 온당치 않다고 했다. 일은 그저 일이다. 그는 퇴근 후에야 글을 읽었다. 그리고 노동은 사색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땀흘려 일하는 도중에 몇 가지 착상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머리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를 위로 하는 자세”의 사색이다.

    에릭 호퍼,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005)

    어쩌면 80년대 운동권 학출들이 야학과 노조운동을 통해 꿈꿨던 ‘읽고 쓰는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노동자’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 호퍼는 독재와 자본주의를 뒤집어 엎을 ‘혁명의 주체’는 아니다. 그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정복시킬 마음이 없다.

    그가 돈에 대해 쓴 경구를 보자:

    “Whoever originated the cliche that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knew hardly anything about the nature of evil and very little about human beings.” (돈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클리셰cliche를 만든 이들은 악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에릭 호퍼는 돈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봤다. 돈만 있으면 출신이 비천한 이라도 떵떵거릴 수 있다. 화폐는 권력과 신분, 지위를 환원시킨다. 오히려, 돈은 자유의 동력인 것이다. 돈이 인간을 해방시켰다!

    에릭 호퍼는 정주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자진해서 떠돌았다. 이유는 길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 그에게 사색의 소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길 위로 나서면 일자리는 어디에나 있었고, 일자리가 있는 곳에 잠자리와 먹을거리도 있었다. 책은 퇴근하고 공공도서관에서 읽었다.

    그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읽었다는데, 이 책과의 인연이 재밌다. 여느 때와 같이 일자리를 구했는데, 일하는 도중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함을 알게 됐다. 이 심심함을 달래려 근처 헌책방에 들어가 눈에 띄는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을 집었는데, 그게 바로 그 책이었다고 한다.

    에릭 호퍼가 살았던 20세기 아메리카는 특수한 환경임에 분명하다. 하필 그가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이유를 보라. 그 동네에는 일손을 구하는 농장이 널렸다. 기후도 노숙에 적합하다. 21세기 한국은 어떨까? 대학 청소노동자의 생계임금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사회이다.

    밥벌이란 원래가 비루하다. 일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지, 존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 자존감을 얻을 수 없다면, 별개로 읽고 쓰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독창적 사상가가 되진 못할지언정,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에릭 호퍼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 리더의 자질

    ‘누구나 리더가 될수는 있지만, 아무나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리더가 있기 마련이었고, 공동체가 겪는 문제의 원인을 리더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 공동체 문명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학은 예전에는 제왕학으로 ‘좋은 리더란 무엇’이고, ‘어떻게 좋은 리더를 만들어 낼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政體)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의 ‘좋은 삶’을 보장하는 정치체제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임에 동의하고, 대체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토론의 결과물이다.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 담론은 더욱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이 담론의 내용은 주로 ‘사회가 어떻게 좋은 리더를 길러낼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고 이 형식은 ‘자기계발서’라는 ‘신종 자발적 내적 순응 기제’로 나타난다.

    나는 이 글에서 ‘리더가 꼭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대개 아래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되고, 이런 자질을 잘 갖춘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자질을 갖지 않아도 리더가 될 수는 있고, 때로는 좋은 리더라 불리울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이는 그룹 내 구성원의 마음, 그룹 내 구성원 중의 소수 그룹의 마음, 그룹 외 다수 대중의 마음 모두에 해당된다. 사실, 리더십 담론에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이외의 것들은 그저 리더의 개별성이 빚어낸 다양한 리더십의 제 모습일 뿐이다.

    예를 들어 ‘섬기는 리더십’과 ‘군림하는 리더십’, 이 둘 중에 규범적으로 무엇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두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의 개별성에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말한 두 리더십이 ‘좋은 리더십’ 즉,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은 리더십일 경우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다.

    관용, 포용력 그리고 공감력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과 이를 이해하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감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력이란 곧 다른 사람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한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선 이 ‘미루어 짐작함’이 단순한 짐작을 넘어서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자신의 독특한 인간론을 펼친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는 ⟪군주론⟫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본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사실 보다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것에 더욱 분노하기 마련”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통치자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가슴 깊은 원한을 살 일은 없을 것”이라 당부한다.

    나는 다른 능력들보다 ‘공감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찌보면 인간학의 최고 단계가 아닐까 싶다. 공감력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들과의 상호 작용 경험을 통해서 배양된다. 이 공감력은 자연히 ‘의사소통능력’과 맞닿아 있다. 신호를 분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호를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해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한 인간이 공감력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더 열리어, 많은 사람을 직접 겪어봐야만 한다. 이런 담금질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리더의 자질을 거론하며 리더의 필수 덕목처럼 얘기되는 ‘비전’을 얘기하지 않은 것은 의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비전은 2차적인 문제이다.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이에 대한 그룹 내 구성원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이 비전을 구체적인 기획과 실행으로 옮겨내는 과정에서야말로 리더십이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 비전은 늘 상황에 따라 쇄신되는 유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전 그 자체보다는 비전을 합의하는 능력 또는 비전을 구성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훌륭한 리더, 좋은 리더는 공동체를 이롭게 한다.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을 이롭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일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성취에 사로잡힌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오히려 책임 회피에 급급한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진정성이 없는 칭찬을 남발하며 칭찬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회피하는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그 일의 결과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일의 결과란 때때로 신의 장난이 결정짓는 경우가 있으므로) 함께 일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