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
걸레는 세탁을 해도 걸레.
이 두 문장에 대하여 사람들이 맞다 맞다 하지만 실은 이게 ‘우리네’ 동양적 철학과는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동양적 철학의 근본은 ‘변화’라고 하면서요. 동양만 그럴까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판타 레이, 만물은 흐른다고 했습니다.
걸레는 세탁을 해도 걸레. 이게 맞는 말이라면, 그럼 수건은 세탁을 안 해도 영원히 수건이라는 말이냐, 와 같은 설명도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네? 그런데, 수건은 세탁 해서 다시 수건으로 쓰지만 걸레는 세탁 해봐야 다시 걸레가 맞긴 한데…?’ 비유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크래프톤 웨이 두 번째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게임 산업의 나쁜 점은 인간 본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게임 산업은 상당히 불안정적이고, 업 앤 다운이 심하고, 열심히 만들어 출시해도 성공하는 게임은 극소수… 늘 변하고 변화를 강요받기에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과 맞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비단 게임 산업만 그렇겠습니까. 공공 관료 조직이나 라이센스 등으로 지대를 구축한 일부 비즈니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비즈니스는 변화와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게 디폴트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맞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변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시장은 요동치고 경쟁 환경은 끊임없이 달라집니다. 그 속에서 사람도 바뀝니다. 어떻게든 적응해내고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습니다.
저는 변화를 시작하는 첫 단계가 주어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요인’ 때문에 ‘경쟁사’ 때문에 ‘다른 조직’의 비협조 때문에 ‘대표’ 때문에 ‘매니저’ 때문에 ‘동료’ 때문에… 주어 자리에 ‘나’가 아닌 타자를 놓는 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기회를 포착하고, 어떤 전략과 전술로 헤쳐나갈 것인가. 주어의 자리에 ‘나’를 놓으면 비로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변화를 당하게 됩니다. 내가 아닌 다른 힘에 의해 미래를 규정 당하게 됩니다. 뻔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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