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

올해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허준이(June Huh) 교수(미국 프린스턴大)에 관하여, 과거 수포자(수학포기자)였다 아녔다, 아버지가 누구다, 국적이 어디다, 한국계로 볼 수 있다 없다, 뭐 그런 이야기들보다 그가 학부 시절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온 히로나카 헤이스케(広中 平祐) 교수(역시 1970년 필즈상 수상)의 특강을 들었고, 그 후 혼자 점심을 먹던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이후로 거의 매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수학의 세계로 서서히 걸어들어가게 된 일화가 마음에 닿는다. 역시 만남과 인연이 중요한 것, 아닐까.

나는 그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가 쓴 ⟪학문의 즐거움⟫을 고등학생 때 읽었다. 그 책에서 ‘소심심고’(素心深考)란 말을 만났다.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깊이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들뜬 마음, 흥분된 열정이 아니고 차분하고 소탈한 마음이다. 그 마음을 갖고 살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오래 매달리며 깊이 여러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세계의 여러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끝내 그 문제를 풀어내는 삶을 상상해봤다.

어쨌든 이력상으로는 단 한 번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나는 (그렇다고 순진한 모범생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고등학생 때는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진학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대학생 때는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단 한 번도 그 질문에 속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세상에 주고 싶은지를 물어봤어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 질문들에 답하기엔 나는 어렸다. 나 자신에 관해 세상에 관해 알지 못했다.

무엇이 되지도 않으셨고, 자녀들에게도 무엇이 되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내 앞에는 정말 무한에 가까운 길이 열려 있었다. 그 중 하나의 길을 섣불리 고를 수 없었던 나는 언젠가 운명적인 사건이 나를 휘감을 것이라 기대했다. 무언가 나에게 맞는 일이 찾아지면 내 본능이 내 직감이 알아보고 내게 신호를 줄 것이라 믿었다. 어쩌면 거창한 계기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우연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고 하여도 나는 쉽사리 만족하지 못했다.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소한 시작을 가벼이 여겼다. 가벼운 마음을 존중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나는 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고, 또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들을 모두 끝까지 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과거에 쓴 일기장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나는 참으로 비장하고 거창했다. 결의(決意) 같은 게 있었다. 무언가를 시작함에 있어서 이번엔 여느 때와 다르다는 식의 의미 부여를 자주 했다. 마치 그게 없이는 이 시작 또한 이내 무의미해질 것이 두려웠던 것처럼.

작년 말에 ⟪그냥 하지 말라⟫라는 책을 읽었다: “무조건 열심히만 하는 게 답이 아니다. 잘못된 방향이면 열심히 소진된다. 방향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충실히 해야 한다. 생각을 먼저 하면 된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 테니까. ‘Just do it’이 아니라 ‘Think first’가 되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고, 대체로 수긍이 간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각을 먼저 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리송할 때는 그냥 하면 되는 것 아닐까. 과도한 의미 부여가 외려 발목을 잡는다.

첫 직장과 첫 커리어는 당연히 중요하다. 그게 남은 인생을 결정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일단 시작은 해야 한다. 적어도 나에게 최선이라고 여겨지면 제약 속에 내려진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냥 하면 된다. 역사적 사명과 시대적 소명까지 고려하기엔 버겁다. 그런 건 하다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만남과 인연이 있을 것이다. 허준이 교수가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의 그 난해했다는 특강을 끝까지 들었던 것은 그리고 혼자 점심을 먹던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그가 그 무렵에 과학기자가 되어볼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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